Noli Me Tangere
나를 붙잡지 마라
2014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잡은 것은 이 손이 아니라 그 손이었다.
예수를 만지고 싶던 갈망이 그때 방향을 얻었다.
발을 씻기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요한 13,8
요한복음의 마지막 만찬은 빵이 아니라 대야로 시작된다. 씻는 쪽이 무릎을 꿇고 씻기는 쪽은 받는다. 먼저 씻긴 사람만이 신발을 벗을 수 있다. 이 작업은 신발을 달라고 하기 전에 발을 씻기는 데서 시작되었고, 씻긴 발에서 벗겨진 신발은 버려지지 않고 물려받아진다.
전문 읽기
공관복음의 "받아 먹어라"가 능동의 명령이라면 요한의 세족에서 제자는 받는 자리에 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은 참여의 조건이 자격이 아니라 먼저 주어진 사랑임을 말한다. 세족은 성찬의 대체가 아니라 성찬의 해석이며, "내가 한 대로 하여라"(요한 13,15)는 "이를 행하여라"의 요한식 번역이다.
작가가 씻기는 자리는 예수의 자리가 아니라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는 제자의 자리다. 먼저 씻긴 사람이 씻긴다. 세족은 촬영되어 관객에게 먼저 보이고, 관객은 그 발이 씻기는 것을 본 뒤에야 그 신발에 발을 넣는다.
신발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탈출 3,5
벗다, 물려받다, 신다.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는 이름을 불리고 신을 벗는다. 신발은 피부 위의 또 하나의 피부이고, 그것을 벗는 일은 예절이 아니라 무장해제다. 씻긴 발에서 벗겨진 신발을 물려받는 일은 "나와 함께 나누는 몫"을 받는 일이다. 관객은 자기 신발을 벗고 난민의 신발을 신는다. 그 신발이 예수의 신발인 까닭은 하나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전문 읽기
호명은 식별이 아니라 재창조다. 이름을 불린 관객은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옮겨 가며, 그다음에 벗는다. 벗음은 소유와 방어를 내려놓는 존재의 포기이고, 맨발은 결핍이 아니라 준비다. 거룩한 땅은 접촉을 금하는 땅이 아니라 접촉의 주도권이 내게 없음을 발로 알게 하는 땅이다.
"나의 신발을 벗고 너의 신발을 신다"라는 공감의 정의가 여기서 문자 그대로 실행된다. 신발 안에 녹음된 목소리는 설명하지 않고 증언한다. 그러나 신는 것은 아직 완성이 아니다. 전기는 아직 흐르지 않는다.
손을 잡다
"나를 붙잡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요한 20,17
마리아의 손은 부활한 이를 붙들려 하고 그 손은 멈춰진다. 금지는 촉각의 거부가 아니라 방향의 전환이다. 붙들려던 손은 "내 형제들에게" 보내진다. 관객이 작가의 손을 잡을 때 비로소 회로가 닫히고 빛과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벗음도 신음도 아니고 손잡음이 완성이다. 나를 내려놓아야 우리 사이에 그분이 오신다.
전문 읽기
회화 전통에서 이 장면은 언제나 두 손 사이의 틈으로 그려졌다. 뻗는 손과 제지하는 손은 닿지 않고 그 간극에 사건이 있다. 퍼포먼스에서 관객의 손이 작가의 손에 닿기 직전의 찰나가 그 간극이다. 전류가 흐르는 순간 접촉은 닫히지 않고 열린다. 만지는 자는 만져지는 자가 되고, 위로하려던 손은 위로받는 손이 된다.
부활의 친밀함은 한 사람을 붙드는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공동체 안으로 옮겨진 관계다. 예수는 이제 만질 수 없지만 이웃의 손을 잡을 때 거기 계신다. 이것은 성체를 모시고 세상으로 파견된 뒤에야 가질 수 있는 사랑이다. 신발의 주인은 여기 없고, 그 부재가 빛으로 만져진다.
의례의 순서
신발의 주인
각 사람의 이야기는 III장 《Empathy》 연작에 있다. 여기서는 이름만 남긴다.
영상 보기 / Films from the Empathy series

